게시판에 채용모집 요강 공고가 붙기 시작한다.
오늘도 게시판 앞의 젊은 발길들이 분주하다.
"야 넌 어쩔래"
"뭘 어째 임마 해봐야지.."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재수 4년 대학 4년
야 참 멀리 왔구나, 먼 길을 잘도 지나왔구나,
학생이란 이름에다 배운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고의로 실수를 하고, 마구잡이로 거짓말을 해되고, 가까운 사람 먼 사람
할 것 없이 틈만 나면 속이고, 벌어진 현실 앞에서 행한 가증스런
자기합리화, 쥐뿔도 모르는 게 독으로 설쳐되고 무수한 엉터리 인격..
뭘 배웠을까,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졸업이다.
진짜 졸업이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가야만 하는 나의 길이다.
앞 장 서 끌어주시던 부모님을, 이제는 내가 보호하며 가야할 길이다.
주시하는 주변 시선들. 이웃들의 끈질긴 관심, 지금까지 이끌어 온 손길들,
이들의 기대, 아 이를 어쩌나. 그들에게 뭘 보여줄 것인가,
나를 위해선 또 뭘 할 것인가, 아 왜 이리도 깝깝하지..
일류 회사에 시험을 봐야 한다. 그리고 합격해야만 한다, 이게 전부다.
그 외 무엇이 더 필요하냐 지금 이 순간에
긴 여정의 끝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
6-3-3-4-4 전법으로 학교와 학교를 거치면서 온 길 아니냐 어찌 승부
한 번 안 걸어보고 무대를 내려온단 말인가 더욱 운동장을 그냥 떠나
꿈꾸어 온 영화 같은 삶도 그려보고 싶고, 끝도 없이 타오르는
맹렬한 불꽃이 온 들판으로 확 번져나가도록 겁 없이 겁 대가리 없이
불질러 버리고 싶다.
캠프스의 고상함도 넉넉한 교정의 정서도 이미 전설인가. 정취도
대학의 자유도 아무 것도 없다 긴장감과 위축과 취직시험 합격이란
강박감만이 짖눌러 온다. 모집 채용 공고는 이미 선전 포고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데.. 아 절박하다 너무 절박하다.
"야 결정 했나 낼이 마감인 데"
"으응 은행으로 했다"
접수하고 보니 가장 약한 은행이었던지 경쟁률은 이십 몇 대
일이란다. 달랑 볼펜 하나 들고 청파동 어느 여자 고등학교에서
입사 시험을 치렀다. 될지 떨어질지 감이 안 온다, 전혀
"야 니 합격했더라"
얼마나 기쁜지 신나는지, 한 순간 숨이 딱 멎어 버렸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현관 앞으로 단숨에 내 달았다
아 정말 있구나 아 합격했구나 아 정말이구나
아 합격했다 아 합격이다 합격했단 말이야
생애 최대의 한 순간, 한 줄기 눈물이 메말랐던 감정을 확 적시고
지나간다. 엄마라도 부르며 한바탕 울고픈 순간이다
정말이지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몇 주 후 신체검사. 몇 가지 병 또는 모르고 있던 병으로하여
불합격 되는 경우도 있다는 참고 사항을 듣고 신체 검사장으로 왔다
"꿈꾸는 별"들의 행진인가 모임인가 불타는 희망과 격정으로 옷 입은
건장한 야망들이 팬티만으로 검사의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쳐간다.
X-ray찰영장, 내 앞으로 몇 명이 있고 또 뒤쪽으로도 몇 이어져 있다.
마침내 내 앞에 두 세 명 남았을 그 때
"야 동석아"
"와 야 니 어디 아푸나 얼굴이 와 이러노" 이 자슥 얼굴이 숯 검댕이네
"X-ray찍으면 결핵 흔적이 나오는 데 니가 대신 좀 해줄래"
"오야 그러자"
(이 것도 대리 시험인가, 결핵은 불합격이라는 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