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대법관 1호 40대 김영란 판사. 그의 남편 검사 출신의
강지원 변호사 법률사무소 대표 kbs라디오 프로 진행자.
출근길 청취자들에게 필요한 뉴스 브리핑, 국제경제 동향, 국내외 주요 뉴스의
사실보도 및 분석을 함으로써 세상 흐름에 대한 이래를 돕는다. 특히, 오피니언
리더들을 주 타킷으로 심도 깊은 시사 해설과 논평을 통해 본격적인 라디오
저널리즘을 추구한다.
kbs라디오 진행자 강지원 변호사, 대법관 김영란 판사의 남편이다. 그의 부인
김영란 판사가 대법관에 임명되자 변호사 사무실 대표직 사퇴 또한 라디오
프로에서도 떠나 현재는 주로 공익사건만 맡고 있다한다
.
사랑을 위해 왕위까지 내어놓은 영국 에드워드 국왕, 그의 사랑 심슨 부인은
미국해군 소위와 이혼한 경력이 있으며, 어니스트 심슨과 다시 결혼함으로써
심슨 이라는 姓(성)을 얻었다. 그녀는 한 사교 모임의 일원으로서 정작 이 웨일스의
왕자(에드워드 8세)와 심슨 부인이 만나 사랑의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은1934년
이었다한다. 심슨 부인이 에드워드 전왕과 열애하는 와중에 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공식보고도 있다. 1936∼1937년 경찰보고서에 따르면 심슨 부인은 유부남
자동차 세일즈맨과 연정을 나눴다. 가이 트런들이라는 북부 잉글랜드 출신의 이
자동차세일즈맨은 "아주 잘 생기고 매력적인 모험가이며 좋은 집안 출신으로 춤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묘사돼 있으며, 심슨 부인이 이 남자에게 비싼 선물과 돈을
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그의 유일한 동지는 이미 퇴역한 윈스턴 처칠 경뿐.
에드워드 왕과 심슨 부인의 애틋한 사랑은 당시 全 세계 신문과 잡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영국 내에서는 정부와 왕실의 강력한 저지로 언론에서 그가 왕위를
거의 내놓을 무렵까지 전혀 다루어지지 않기도 했다.
<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의 뒷받침을 받지 않고는 왕으로서의 나에게 끊임없이 부과
되는 부담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심슨 부인과 나는 그녀가 여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그저 내 아내로서 그녀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직함과 작위를 바랄 뿐이라>(연설문)하고 바로 그 날 밤 에드워드
왕은 호주로 건너가 친구의 집에서 몇 개월 간을 머무르며 심슨 부인의 이혼 절차가
완료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결국 왕위에서 물러나 2년간 자의반 타의반의 망명
생활을 한 에드워드 전 국왕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6세 국왕에게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 했으나 거절당했다
1937년 6월 3일 드디어 프랑스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이후 영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를
다녔으며 에드워드 前 영국 국왕은 프랑스의 연락 사무소에서 근무를하기도 했다.
영국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두 사람은 1967년에야 비로소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공적인 왕실 모임에 초대되기도 했다.
에드워드 전 국왕은 36세때인 1930년 한 파티장에서 두 살 연하 유부녀인 심슨 부인을
만났다. 그는 1936년 왕위에 오른뒤 심슨부인의 남편에게 이혼을 요청하고 심슨 부인과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이혼을 금하고 있는 영국 성공회 수장으로서의 신분 때문에
영국의 헌법위기 논쟁이 발생했고, 결국 왕위에서 물러난 1937년 로이어밸리의 한
성에서 불과 16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심슨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그는 1939년
잠깐 영국에 들어 올 수 있었으며 나머지 여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내다 1972년
세상을 떠났다. 조지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에드워드8세가
세상을 떠나자 윈저 공작부인(심슨 부인)을 버킹엄궁으로 불러 살도록 허락했다.
두 사람은 사망한 이후에도 나란히 영국 윈저 궁 뜰에 묻혀 있다. 세기의 러브스토리,
에드워드 왕과 심슨 부인의 고귀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 연설은 1936년 12월11일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됐는데 윈스턴
처칠 경이 에드워드 왕의 거의 유일한 동지로서 위 연설문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이십 몇 대 일의 어려운 시험을 합격하고 입행 전에 수습인가 실습인가 교육인가 뭐
그런 교육 기간이 있었다. 서울로 오기는 했는 데 당장 근무지가 서울 대구 등 어느
쪽으로 결정할지 또 어디로 발령을 받을지도 모르는 데 하숙을 하기도 그렇고 자취는
더욱더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안되겠고, 결국은 청파동에 있는 독서실로 들어가
독서실 책상에서 엎드려 자면서 교육기간을 떼웠다. 몇 개월 간 신발 벗을 일도
별로 없고 더욱 발씻을 일이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 당시 발 안 씻고 신발을 꼭
신고 생활했었기에 무좀이 생겼고 또 발 모양도 이렇게 못 생겨져버리진 것 같다
아침엔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죽으로 하고 출근하면 6층 연수실에서 교육하고 12시
되기도 전 식당으로 가게되니 아침의 꿀꿀이죽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되었지.
원래 많이 엄청 많이 먹는 양인데 아침이 부실하니 점심은 이삼 인분은 먹어야 속이 찬다.
그러니 이 서울 귀한 집 도련님들에겐 무슨 큰 구경꺼리 생겼지, 그때도 식권이었는 데
돼(지)식가 구경(?)한다고 서로 밥들을 가지고 왔었다. 그 후 서울 발령 받아 직속 상관
대리님의 소개로 월남에 파견 나가있는 송 대령님 집에서 대접받으며 잘 지냈다.
여러 연수 과목 중 유독 돈 세는 걸 연습하는 시간이 있었다.
모조지폐를 주고 그걸 부채꼴로 펴서 세는 것과 앞으로 세는 것 등을 연습시켰다
이 돈 세는 거 꽤나 귀찮고 번거러운 것 중의 하나였다 또 잘 돼지도 않는다,
그 날도 예의 돈 세기를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나와는 책상 두어개를 사이에 둔 서울의 학부 출신이 돈 세기를 하다말고 벌떡
일어나 급히 창가로 오더니 창문에서 "야" 하는 고함과 함께 모조지폐를 창문으로 확
뿌려버리고는 "나 안 다닌다"하고는 그냥 나가버렸다.
선언하듯이 그만 두겠다하고는 그냥 떠나 가버렸다.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던지.
이십 몇 대 일에다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이처럼 화려한 평생직장을 저렇게 멋있게
내팽개처버리다니..
버림으로해서 더 존경 받을 수 있는 건 뭘까
버림으로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게 뭘까
버림으로해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버림으로해서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