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비리 사건의 또다른 줄기로 뻗어나온 부실채무 탕감 비리와 관련, 검찰이 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를 긴급체포했다.현대차로부터 채무 탕감 로비 대가로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김동훈씨 로비와 관련해 또다른 인사가 체포돼 현재 조사를 받고 있으며, 관련자 다수가 출국금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초 이번주까지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마무리하고 현대차 로비 의혹 수사는 다음주부터
본격화할 것이라고 밝혔던 검찰이 생각보다 일찍 관련자 신병 확보에 나선 것이다.
검찰이 이같이 서둘러 수사에 착수한 것은 현대차의 부채 탕감 비리에 대한 검찰의 평가가 "설마 설마
했는데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됐다"며 이례적으로 강력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국책은행이 기업의
비교적 건전한 채무 일부를 탕감해준 뒤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공적자금을 투입 받고, 이같은 과정에
금융 감독 당국과 정부투자기관이 일정 정도 역할을 했다는 의혹에 대해 검찰은 제2의 공적자금 비리에
수사에 나섰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 검찰은 현대차 부채탕감 로비에 대한
혐의에 국한된 수사이며, 공적자금에 대한 전면 수사를 벌이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건을 파다 보면 자꾸 가지치기를 하게 된다"며 사실상 수사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있다.
당장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은 "수사 인력을 충원할 계획이 있다"며 수사 확대를 시사하고 있다.
그동안 공적자금 수사는 부실 채권을 양산한 기업주로 국한돼 왔다. 대검 공적자금단속반은 2001년
12월부터 4년여 동안 수사를 벌인 끝에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부실기업 임원과 주주 200명을
사법처리했다. 관련 공무원과 금융기관 직원에 대한 사법 처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수사 초점은 사실상 로비를 시도한 현대차가 아닌 로비 대상인 금융기관과 감독기관, 정부투자
기관이다. 이번에 긴급체포된 박상배씨가 부총재로 있던 산업은행은 자사가 보유하고 있던 1000억원
규모의 위아의 담보채권을 한국자산관리공사에 매각한 뒤 다시 사들이고, 이를 다시 입찰에 부쳐
자산유동화회사 신클레어에 파는 과정에서 205억원의 손실을 냈다.
검찰은 이들 채권이 대부분 담보부 채권이었는데도, 이처럼 할인돼 매각된 것은 관련 기관에 대한
김동훈씨의 로비가 통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산업은행이 굳이 캠코에 매각했다 풋백옵션을 행사해
다시 매입한 것은 공적자금을 투입받기 위한 조치였다는 설명이다. 현대차가 이같은 방법으로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아주금속과 위아의 부채 2000억원 가운데 550억원을 탕감받았다. 김동훈씨에게
41억6000만원을 건넨 돈을 비용으로 치면 거의 13배 이문이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그러나 그만큼
공적자금이 투입돼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는 결과가 초래됐다. 이같은 과정이
실제로 김동훈씨의 로비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밝혀질 경우, 공적자금이 사실상 '눈먼돈'으로 취급됐고,
이 돈을 기업과 국책은행, 감독기관 관계자들이 나눠가졌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IMF 이후 작년 말까지 금융회사 부실화를 막기 위해 투입된 돈이 167조8000억원에 이른다. 현재까지
90여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이 회수되지 않고 있는 것에 공적자금 집행과 관련된 기관도 일조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번 검찰 수사는 금융-당국-업계의 추악한 범죄 사슬에 검찰이 메스를 들이댄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검찰이 이번 사건을 "IMF 이후 부실기업 정리를 위해 만들어졌던 시스템을
최대한 악용한사건이 최초로 드러난 것"이라고 밝힌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