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있을 때의 일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있는
조그마한 이발소에 젊은 청년들이 들어와 이발을 하며 나폴레옹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젊은이가 죽어 간다고 그를 비난하고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흥분한 사람은 이발사였다. 이발사는 면도칼을 손에 들고 휘저으며
"나폴레옹이 내 앞에 나타나면 이 면도칼로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하며 흥분했다.
젊은 청년들이 나간 후 이발사 혼자 있을 때 점잖은 신사 한사람이 이발소 안으로
들어 왔다. 이발사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점잖은 신사를 보며
"나폴레옹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간다"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젊잖은 신사는 "우리나라의 국운이 그래서 그렇지 아무렴 나폴레옹
한사람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한사람 때문에 젊은이들이 죽어가겠소"하고
대답했다. 이발사는 "아니요 나폴레옹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때문에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 것이요 만약 나폴레옹이 내 앞에 나타나면 이 면도칼로 목을
베어버릴 작정이요"하며 이발을 시작했다. 면도할 차례가 되자 점잖은 신사는
이발사에게 말했다. "여보, 이발사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의 목이 자네 손에 달렸네.
면도 잘 하게나!" 그 말을 듣고 난 이발사. 점잖은 신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진짜
나폴레옹 황제가 아닌가? 그 때부터 이발사는 온 몸에 식은땀이 나오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떨지 말고 면도 잘하게"하며 다시 한번 일침을 놓았다. 이발사는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며 면도를 마쳤다. 나폴레옹은 웃으며 이발사에게 "자네
수고했네"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이발소를 떠나갔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탄핵
재판의 재신임 소식을 이발 중에 접했다고한다
이발의 역사는 3,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에는 머리에 부상을 입은 경우
머리칼을 삭발하고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의 이용사는 의사직분을
겸직했다고 한다. 점차 사회구조가 복잡해지자 1804년 나폴레옹 정부가 이용원과 병원을
겸할 수 없다고 결정, 프랑스 최초의 이용사 쟝바버(Jean Barber)를 통해 이용원을
분리시켰다한다. 이용의(醫)는 수술이나 상처의 치료 등을 했고 그 후 의학이 발달하면서
외과가 의학의 분야로 기록되게된 12-13세기 경부터 외과 의사가 역사에 등장했단다.
당시의 사상에서는 상처의 치료나 수술을 한다는 것은 천시 여겼다. 이용업무와 의사업무가
별도의 전문직으로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시대부터
이었다하며. 현재 이발소에서 볼 수 있는 빨강·파랑·하양의 줄무늬가 들어 있는 표지
(사인폴)는 동맥·정맥·붕대를 상징하던 당시 관습의 흔적이며 이발사란 뜻의
바버(barber)는 라틴어의 턱수염(barba)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1895년(고종 32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면서부터 이발이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이발사는 왕실이발사 안종호라고 전해진다. 이발사는 노동 수요와 공급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므로 비교적 안정된 직종이라 했다한다. 이용업은 단순히 머리
카락을 자르고, 감기고, 수염을 면도하는 실용적 측면의 이용에서, 점차로 헤어패션을
중시하는 헤어스타일리스트 살롱이나, 머리카락의 건강을 관리하는 헤어클리닉 살롱으로
발전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발하고 오면 이미용사가 한 것이 절대적(?)이라고 해서 그러는지 감히 손댈 생각을
않는다. 좀 길어 보여도 눕힐 생각을 하지 자를 생각은 않는다. 머리털이 일어서 있으면
드라이기로 녹여 눕히거나 머리 크림으로 붙인다. 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머리 카트
하고 온 얘들의 머리카락이 좀 길거나 이상하거나 일어서 있어도 물로 붙이고 부벼서
눕힌다. 이미용사의 기술에 절대권(?)을 부여하는지 아님 부모는 얘들의 머리털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관습법이라도 있는지 그것도 아님 얘들이 그걸 반대하는지 혹은 남편이..
그것도 아니라면 엄마가 아내가 손 댈 자신이 없는 건가. 이미용소 다녀와서 머리가 좀
이상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비벼서 모양을 낼 일도 물을 바를 일도 없고 드라이로 꿉을
일도 없다. 면도칼로 살짝 머리카락을 건드리기만하면. 깜쪽 같이 전체 분위기가 살아난다.
이미용사가 절대적이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결코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도 아니다. 본인도
그냥 대충 익숙한대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운전 교습소에서 실습교사가 아 여기
보이지요 할 때 안보이는데도 아 예 보입니다했던 기억이 난다. 실수 할 일도 없다
그거 뭐 대순가 머리 아주 금방 자라고 또 아무리 이상해도 하루 이틀 길게는 삼일만
지나면 곧 눈에 익는다. 얘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다. 얘들의 머리를 가장 잘
가꾸어 줄 사람도 역시 엄마다. 처음엔 원형 탈모 같은 실수도 했다. 헌데 불과 삼사일만에
나만의"특별"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전혀 의식을 않게되더라. 얘들의 머리 몇 번만 하면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삶의 재미와 잔잔한 여유로움이 살아 날 것이다.
별놈의 헤어스타일을 다 즐겨봤다. 베컴의 닭벼슬 스타일도 하고 또 밑 부분을 완전히
빡빡 밀어버리는 GI스타일도 곧 잘 하고 옆 부분을 면도칼로 싹 깍아 버리고 긴 뒷머리만
남기는 고대 로마 군인 스타일도 즐긴다. 물론 바람 머리도 아주 좋와 한다. 면도는 가위로
한다, 짧은 수염으로 인해 deep kiss에는 상당한 애로가 있으나 면도 후에 얼굴에 로션이나
크림을 바르는 것의 거부감으로 그냥 가위로 하고 있다. 보통 때는 얼굴이나 손을 씻어도 그냥
말린다. 화장품 대신이라면 맞을 것이다. 우린 우리가 화장품을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화장품을
고르나사실은 화장품이 나를 고르는 것이다. 내 환경 내 지식 등에따라 선택당해지는 것이다.
화장품은 없어도 향수는 몇 종을 가지고 있으며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내 젊은 시절 향수 뿌린자를
향해 "야 이 개새끼야 남자의 향수는 땀 냄새야"라고 짖어되던 인간이 공항면세점이나 화장품 가게를
지나면흰종이에 향수를 뿌려논 긴 종이 갈피의 향을만난다.맘에 확 당기는 향수는 그냥 사버린다,
그래서 몇 종을 가지고 있으며 한 삼사 년 전에 페르몬이 제법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이성을 부런다는
것이 었는 데 내가 그 향수에 빨려들어서 손수건을 끄내면 그냥 느긋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비행기를 타도 한국인이라 보는 사람 별로 없다. 인천 공항의 삐끼들도 영어로 덤비고 명동 지하
상가에서는 일본말로 다가온다. 내 머리 내가 깍은 지가 한 칠판년은 돼 가나보다. 처음엔 종로세무서
뒤 종로사우나에서 시작하였고 요즈음은 집에서 하는 데 헤어링 시간이 참 즐겁고 신나고 기대도 된다.
가위와 면도칼 들고 욕탕으로 가서 그 순간의 기분에 따라 칼 가는 대로 그냥 따라간다. 대개는 흡족하게
되어진다.
인간의 영원한 화두가 자기 뒤통수를 자기가 보는 것 아닌가. 엄청나게 끊질긴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지 머리도 못 깍는 우리 아닌가. 조금만 모양이 달라도 이발 잘 못했다고
아우성이다. 잘못한 이발이 아니다. 다만 눈에 익지 않을 뿐이다. 하루만 지나면 정상이다.
익숙하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더 편한고 더 낫고 더 좋은 것들을 다 마다하고 그냥 인내하면서
감내하면서 지내고 있는 경우가 내주변 우리사회에 꽤 많이 있다
(따듯한 정도-溫度-를 물어면 영하5도라한다 영하5도라면 溫度가 아닌 寒度 아닌가)
'기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23) | 2004.12.20 |
---|---|
이 시간도 진화는... (16) | 2004.12.15 |
뭘 까 (16) | 2004.12.13 |
보리 피리 (26) | 2004.12.12 |
착각하지마 (13) | 2004.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