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kook
2005. 8. 31. 08:05

오늘도 성공의 길 승리자의 지리로 한 걸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 가는 net인간 관계의 형성에 모두가
아군으로 친구 임을 염두에 두고 do as like their servant ...
과거의 적이 오늘의 사업동지로 | [나의성공학]'국민의 비서 114' 코이스(KOIS) 대표 박균철..네번째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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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KT 베트남 하노이 사무소장 자리로 가는 것이 결정된 순간, 필자는 25년 전 파병 한국군의 신분으로 참전하였던 베트남에서의 시절이 떠올랐다.
아직도 역사적 해석이 분분한 베트남전. 그 당시에도 미국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남·북 베트남) 각각의 입장은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산업생산을 통한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3년차인 1963년에 베트남전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한·일 협정이 체결된 1965년에는 본격적으로 전투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개발자금을 '한·일 협정'과 '월남파병'이라는 수단을 통해 일본과 미국에서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게 된 것이라는 해석은 이미 그 당시에도 식자층에서 공통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더구나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무기 현대화, 군사력과 전투력 강화, 그리고 그를 통한 '공산주의의 남침에 대한 대비'라는 냉전시대의 논리가 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베트남전을 치른 한국은 이후 중동의 개발 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외국자본에 의한 경제발전의 흐름을 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제적 관점의 역사관은 정치 논리에 밀려 크게 부각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한편, 베트남을 거점으로 하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했던 미국은 '도미노 이론'과 '할슈타인 원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면적으로는 무기판매와 군수산업 육성의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내전에 참여하기 위한 명분으로 한국군의 참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당사국인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독재와 부패로 얼룩진 남베트남 정부의 퇴진을 위해,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나름대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었고 미국의 간섭에 부정적이었던 그 당시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폄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국민들은 호치민을 민족주의자이자, 독재 정권 타도에 앞장서는 투사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야말로 각국의 논리와 서로 다른 입장이 엇갈린 가운데, 갯벌의 모래같았지만 최소한 겉보기에 남베트남과 미국 그리고 한국은 한 덩어리로 움직여야 했다.
파병된 군인으로서 역사적 해석이나 정치적 견해보다 긴박한 것은 당장 싸워야 할 적에 대한 분석과 우리의 승리를 위해 전술을 짜내는 것이었다. 어쩌면 베트남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파병 한국군의 입장과 피해 상황은 그 당시에만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심각한 고민도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나름대로의 이해와 경험한 바에 따른 남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해석이 엇갈리는 베트남 전쟁. 그곳에서 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감하는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베트남 우정통신공사(VNPT)의 덕(Duck) 수석 부사장과의 사업관계가 바로 그러한 만남이다.
필자는 베트남 파병기간 동안 정보부대 소속으로 적군의 정보수집과 분석을 수행하였는데, Mr. Duck은 적군인 월맹군 정보장교로 근무하였다는 것이다. 25년 전 피아(彼我)로 나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사이에서 이제는 사업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로 변모한 것이다.
95년에 베트남에 도착하여 통신사업 수주를 위해 방문한 VNPT 에서 우리는 과거 대립의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새로운 관계를 기대하며 기분좋은 악수를 나누게 되었다. 하노이 사무소장 시절 그는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사업적으로는 서로 협력하였다.
물론 국영기업 고위직 신분인 그의 입장으로 인해 업무적으로는 투명하고 공정하게 거래하였지만, 생활과 문화적인 측면으로는 배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를 대표하여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던 필자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그 때의 인연으로 지금도 그와는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낸다.
인간의 생명과 도덕성보다는 국제 정치적 힘의 논리,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살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는 전쟁터-과거엔 실제 전쟁, 지금은 경제 전쟁이다-에서 필자는 보석보다 더 소중한 현장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자 살아있는 지식이었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도피하듯 흘러갔던 전쟁터 베트남에서 삶의 치열함과 소중함을 느꼈다. 직장 생활의 한계에 부딪히던 장년에 찾아간, 대부분이 기피하던 근무지에서 필자는 진주보다 더 영롱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박균철 | 08/3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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