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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 하렵니다
bukook
2006. 4. 2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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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있노라면 그들의 너스레에 절로 서글퍼지기도 하고 흥겨워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어깨가 들썩거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애잔하게 넘어가는 선율에는 통곡같은 아픔이 담겨있고,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노랫말에는 체증까지 뻥 뚫릴 듯한 후련함이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타령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새 입술은 실룩거리고 가슴은 쿵쾅거립니다.비록 나달나달 떨어지고 겹겹이 기운 옷을 입었고, 제대로 씻지 않아 꼬질꼬질한 모습이지만, 그들이 하는 구구절절에는 피같은 진실이 배어있고 뼈대 같은 철학이 들어있습니다. 인간 누구나가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가 담겨있습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내란 놈이 이래 봬도 정승판서 자제로서, 팔도감사 마다하고 돈 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네. 각설이라 역설이라 동설이를 짊어지고 지리구 지리구 돌아왔네. 동삼 먹고 배운 공부 기운차게도 잘 헌다. 초당 짓고 배운 공부 실수 없이 잘 헌다. 논어맹자 읽었는지 자왈자왈 잘도 헌다. 목구멍에 불을 켰나 훤하게도 잘도 헌다. 높고 높은 양반님네 심청전을 읽어 봤냐? 난 골백번도 더 봤다. 맘씨고운 심청아씨 삼백석에 몸을 팔아 맹인아빠 눈을 떴소. 심술궂은 뺑덕 어미 남에 것만 탐내더니 용케 죽어서 지옥 갔소. 아가야 아가 울지 마라 열흘 굶은 나도 있다. 올 저녁만 참아다오. 복스러운 주인마님 먹다 남은 찌꺼길랑 없다말고 보태줘여. 각설이 타령에는 살다보면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져야 하는 고통도 담겨있고, 원수 맺고 미워하지만 아닌 척 하고 만나야 하는 고통도 담겨있습니다. 명예·재물·권력·사랑 등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도 담겨있고, 살아 숨쉬는 한 몸과 마음에서 끊이지 않게 생기는 갈등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부르는 타령 속에는 지지고 볶으며 사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하나에서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있습니다.
비가 오면 다리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개울에 넙죽 엎드려 벌컥벌컥 물을 마시지만 가난을 누구의 원망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이슬이 나리면 처마 밑으로 들어가 이슬을 피하고, 엄동설한이 찾아오면 움막집을 찾아 동패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의 체온으로 한 겨울을 나며 인고(忍苦)를 체험합니다. 그들은 마음가고 발길닿는 대로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만 인심과 소문을 따라 얽매임없이 문전걸식을 할지언정 세상만사를 풍류합니다.
작년에 왔던 강남 제비 올 봄에도 또 왔소 허어 품바가 들어간다 일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일락서산 해가 지니 엄마 찾는 송아지의 울음소리 애절쿠나 이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이슬 맞은 수선화야 네 모습이 청초롭다 삼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삼월이라 봄이 된 뒷동산에 진달래는 벌 나비 오기만 기다린다 사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사랑하는 우리 님께 꽃 소식을 전해줄까 오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오월 하늘은 천자 및 배각 한 쌍이 춤을 춘다 육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유월 목단 피었다오. 창포물에 머리감고 정든 님 오기만 기다린다 칠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칠성님 전 소원 빌어 노처녀 신세나 면해 볼까 팔자나 한 장 들고 보니 팔월 가배 달 밝은데 오매불망 부모형제 고향 생각 절로 나네 구자나 한 장 들고 보니 귀뚜라미 슬피 울며 가을밤은 깊어가네 십자나 한 장 들고 보니 십자매야 백자매야 우리 민족 오천 자매 품바 타령을 추어보세 허어! 품바 잘도 헌다
각설이를 한문으로는 물리칠 각(却), 베풀 설(說)로 씁니다. 그러나 일설에는 각설이를 깨달을 각(覺), 말씀 설(設), 다스릴 이(理)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인생의 심오함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장타령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듣고 있노라니 어깨가 들썩거리고 마음이 후련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배꼽을 잡게도 합니다. 살벌했던 마음이 누그러지며 촉촉해지니 각설이타령 속으로 빠져 봅니다. 공부하지 않는 선비들을 한바탕 조롱하고 나서는 인생을 노래했습니다. 젖먹는 아기송아지를 빌어 태어남을 노래하고, 이슬맞은 수선화의 함초롬한 모습과 벌·나비의 나풀대는 날갯짓에 처녀총각의 뜨거움을 실었습니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노래한 듯 하지만 거기엔 인생의 유년기와 청장년기 그리고 노년기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살다보니 가끔은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퍼질러 앉아 육두문자 섞어가며 질펀하게 욕 한 마디 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마음에 끓어오르는 분함이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각설이 타령을 부르면 될 듯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지는 거지일 뿐'이라고 각설이의 모든 것을 치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세타령을 하듯 읊어 대는 그들의 타령에는 회초리같은 따끔함과 햇솜 같은 포근함이 있고, 애틋함과 간절함도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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