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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통과한 경부선 고속열차가 한 폭의 점묘화 속으로 빨려든다. 초록 캔버스에 주홍색 물감으로 무수한 점을 찍은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린 청도반시가 차창 밖으로 휙휙 흐른다. 희미한 기적소리가 들판을 달려 청도 감마을 돌담길로 산책을 나서면 수줍은 듯 빨갛게 익은 홍시가 툭툭 떨어져 울안 낙엽더미 속에 숨는다.
‘문상할 일이 있어 밀양 가는 길/기차가 마악 청도를 지나면서/창밖으로 펼쳐지는 감나무 숲/잘 익은 감들이 노을 젖어 한결 곱고/감나무 숲 속에는 몇 채의 집/집안에는 사람이 있는지/불빛이 흐릿한데,스쳐지나는/아아,저 따뜻한 불빛 속에도 그늘이 있어/울 밖에 조등(弔燈)을 내다 걸었네’(정희성 시인의 ‘청도를 지나며’)
소싸움의 고장인 경북 청도는 전국 최고의 감 생산지이다.
경부선 기차를 타고 청도의 가을을 달리거나 자동차로 고개를 넘으면 마을과 산자락을 온통 주홍색으로 물들인 감나무 숲이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경북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청도는 비슬산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산에 둘러싸인 산악형 분지. 청도와 대구를 연결하는 헐티재와 팔조령,경산과 이웃한 남성현재,창녕과의 경계인 비티재,그리고 언양과 분수령을 이루는 운문령에 고갯마루에 서면 발 아래로 감나무 숲의 주홍색 물결이 황혼에 물든 바다처럼 물결친다.
청도에 감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이곳 사람들은 눈을 뜨면 감나무만 보인다고 한다. 감나무 한두 그루쯤 없는 집이 없는데다 이곳에선 학교와 교회 정원수도 온통 감나무다. 마을도 감나무 숲에 둥지를 틀고 있고 산자락의 무덤도 감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당연히 감 생산량도 전국 1위인 250만 톤으로 개수로 환산하면 1억7000만개나 된다. 국민 한사람이 청도 감 3∼4개를 먹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양이다.
경부선과 나란히 달리는 25번 국도와 창녕과 운문댐을 연결하는 20번 국도의 일부 구간은 가로수조차 아예 감나무다. 감잎은 벌써 낙엽 되어 포도를 뒹굴고 산자락 감나무 밭에는 노인들이 지게를 받쳐놓은 채 긴 장대로 잘 익는 홍시를 따고 있다.
청도 감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씨가 없다. 460년 전 이곳 신촌 출신의 박호 평해군수가 귀향시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감나무 접수를 무속에 꽂아 와서 청도 감나무에 접목하자 씨 없는 감이 열렸다고 한다. 더욱 신기한 것은 멀쩡한 감나무를 청도에 옮겨 심으면 있던 씨가 없어지고 청도의 감나무를 다른 지역에 옮겨 심으면 없던 씨도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청도의 감나무가 암꽃만 피어 수분(꽃가루받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감꽃이 피는 오월엔 운문댐에서 피어오른 짙은 안개가 벌과 나비의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더욱 수분이 불가능하다.
감나무 숲에 둥지를 튼 청도의 마을 중 아름답지 않은 마을이 어디 있으랴만 남성현재 아래에 위치한 송금리마을 만큼 운치 있는 곳도 드물다. 경부선 기차가 남성현터널을 통과해 청도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송금리마을은 150가구의 아담한 농촌마을. 울안의 감나무가 담장 밖으로까지 가지를 드리운 골목길에 들어서면 나지막한 돌담길이 반갑고 감나무 가지에 올라 긴 장대로 홍시를 따는 노인들의 모습이 정겹다.
새마을운동 발상지로 알려진 신도리는 청도 최대의 감 생산지. 신도1리 마을 진입로엔 모두 213개의 새마을기가 일렬로 늘어서 펄럭이고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답게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아담한 높이의 담장은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감나무 가지를 떠받치고 있다.
신도2리 마을 뒷동산에서 만나는 마을 풍경은 더욱 감동적이다. 홍시가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 가지 사이로 빨랫줄처럼 뻗은 철길을 달리는 기차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청도읍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청도를 동서로 나누는 곰티재를 넘어 운문호를 향해 달리면 드넓은 감나무 밭이 펼쳐진다. 떼까치가 감나무 꼭대기에 열린 홍시를 먹기 위해 우르르 몰려다니고 산자락을 붉게 물들인 감나무 밭에선 마치 산불이라도 난 듯 하얀 안개가 피어올라 무시로 산을 오른다.
안개를 먹고 자란 청도 감은 이른 아침 운문호를 붉게 물들이는 태양의 색깔처럼 곱다. 안개의 고장답게 운문호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손오공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다 아침햇살에 주홍빛으로 물들면 안개는 영락없이 감물 들인 무명천처럼 산자락을 수놓는다. 그리고 주홍빛 안개가 스러지고 나면 감 익는 마을의 산자락은 어김없이 주홍색으로 물든다.
■여행메모
서울역에서 동대구까지 고속열차를 타고 이동한 후 동대구역에서 청도역까지 무궁화호를 이용하는 게 가장 편하다. 동대구역에서 청도역까지 무궁화호로 30분. 승용차를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북대구IC에서 신천대로를 타고 30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된다(청도군청 문화관광과 054-370-6376).
청도 감은 씨가 없는데다 육질이 연하고 당도와 수분이 높아 감칠맛이 난다. 가을 한철에만 맛볼 수 있었던 청도 홍시를 살짝 얼려 사계절 내내 먹을 수 있도록 개발한 아이스 홍시와 네 등분한 감을 먹기 좋게 반건조시킨 감말랭이,감으로 만든 감와인,감식초,감선식,감카스테라 등은 청도를 대표하는 농특산품(청도군농업기술센터 054-372-1715) .
청도에는 감물염색을 하는 업체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예던길 따라(054-372-8314)’는 전통 염색기법으로 염색한 천으로 옷,이불,커튼,가방 등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방으로 주인이 직접 만들어 주는 다양한 종류의 차도 맛볼 수 있다.
화양읍의 용암온천은 지하 1008m의 암반에서 솟는 섭씨 43도의 게르마늄 유황온천수로 데우거나 식히지 않아 천연 그대로의 수질을 자랑한다. 용암온천관광호텔(054-371-5500)의 용암웰빙스파는 사우나와 바데풀,그리고 독립된 수(水)치료탕인 아쿠아테라피를 갖춘 온천테마랜드로 여성전용 아쿠아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청도=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