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삶의 길이와 집권의 기간

bukook 2005. 9. 9. 08:16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고

누구를 도우는지 개인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미치고 흔드는지는 최소한 알아야할 터인데, 어떤

거창한 것을 향한 큰 말보다 의미 있는 어이없는 행동을 ...

변용식칼럼] 미 CIA부국장의 이상한 버릇

변용식 ·편집인
입력 : 2005.09.08 18:45 43'


▲ 변용식 편집인
관련 검색어
변용식 칼럼
1980년대 초 미국 이야기다. 당시 윌리엄 케이시 CIA(중앙정보국) 국장은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불신을 사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많이 숨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신뢰를 잃었냐 하면,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 동료들에게 “케이시 저 사람은 당신 코트에 불이 붙어도 얘기 안 해줄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케이시 국장 밑에는 해군중장인 바비 인먼(Bobby Inman)이라는 부국장이 있었다.

인먼 부국장은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케이시 국장이 증언할 때 가끔씩 머리를 숙이고 양말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골드워터 의원이 보다 못해 꾸짖었다. “당신은 삼성 장군인데, 제대로 된 양말 하나 살 형편이 못 되느냐”고. “제 습관입니다”라는 대답이 나왔지만, 의원들은 곧 케이시 국장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때 어김없이 인먼 부국장의 양말 잡아올리는 버릇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직성에서 나온 버릇이었던 것이다. 의원들은 인먼의 그런 행동이 나올 때마다 케이시를 거세게 다그쳐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고, 그런대로 CIA를 견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먼은 정보장교로는 최초로 사성 장군이 되었고, 정보 분야의 ‘수퍼스타’라는 칭송을 받았다.

지금 우리 정부 내에는 인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안에서 뭐가 잘못 돌아갈 때, 상관이 방향을 오도할 때, 직설은 못해도 남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으로라도 견제 신호를 보내는 그런 정직한 참모나 관료는 없는가. 대통령은 얼마 전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고 그동안 잘해왔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느 나라나 국민은 고용·소득 같은 피부로 느끼는 경제 업적으로 대통령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국민 지지도가 20%대로 추락한 대통령으로서는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만약 참모 중에 머리라도 긁는 버릇을 보이며 “그것은 아닌데…”하고 정직한 사인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면, 대통령의 한참 동떨어진 상황인식은 사전에 고쳐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대통령이 “한미동맹은 내가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라고 분위기에 안 맞는 자평(自評)을 한 것 역시 내부 교정장치의 부재를 말해준다.

숨죽이고 가만히 앉아있는 참모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대통령보다 한술 더 뜨는 참모들은 정말 문제다. 대통령이 TV에 나와 “민심이라고 해서 그대로 수용하고 추종만 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할일은 아니다”라고 말하자, 홍보수석은 즉각 “대통령은 21세기에 계시고, 국민은 아직도 독재시대에 빠져있다”고 이승만시대 이래 최고의 아부성 발언(?)을 했다. 어떤 시민은 이렇게 반응했다. “그렇게 뒤떨어진 국민이 어떻게 그런 앞서가는 대통령을 뽑았는지 정말 미스터리야!” 대통령이 잘못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브레이크를 밟아주어야 할 참모들이 더 세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버리니 나라는 갈수록 불신과 갈등의 늪지대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다.

견제 없는 충성 경쟁은 갈수록 참모들의 입에서 무지막지한 ‘말폭탄’과 그로 인한 정책의 경직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늘이 두쪽 나도 부동산만은 잡겠다”는 대통령의 강경발언을 전후로 “부동산 투기는 사회적 암” “부동산투기는 강도나 절도보다 더 나쁘다”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부동산제도를 만들겠다” “투기이익은 마지막 한푼까지 환수할 것” “정권이 바뀌어도, 경기가 나빠져도, 심지어 천재지변이 나더라도 바뀌지 않아야 한다” “부동산 투기자는 국세청이 평생관리한다”는 등의 초강경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연한 정책사고가 나올 수 있겠으며, 누가 감히 이견(異見)을 말할 수 있겠나. 18년간 성공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하고 곧 은퇴하는 앨런 그린스펀은 “부동산 버블 같은 경제쇼크를 다루는 가장 최고의 방법은 유연성”이라면서, 경직적 사고를 경계했다. 부동산 투기를 없애려는 의지는 좋다. 그러나 이 정권이 생산해 낸 경직성의 폐해가 결국 통째로 다음 정권에 넘어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