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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사람냄새 나는 ...
bukook
2006. 2. 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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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법원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해온 판사도 있었다. 정진경(43·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부장판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정 판사는 17년간 법관 생활을 하면서 판결을 쓰는 것 외에도 판사들의 관료화, 서열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꾸준히 발표해왔고,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혀왔다. 정 판사는 90년대 말부터 "법관 서열제는 신라시대의 골품제와 같은 제도"라거나 "사법부는 모든 법관에 대한 임명권과 보직권을 가진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철저히 관료화돼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사면권에 대해서도 "연례행사처럼 행해지는 무차별적인 사면권 행사에 대한 적절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부분이나, 2003년 대법관 인선 과정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현재 대법원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언급한 부분은 법원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 판사는 법조계에서 개혁의 선두주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언론과 법원 밖에서 그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주목하는 것은 법원의 사정을 잘 아는 현직 판사의 사심 없는 주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판사라고 해서 시민으로서 언론의 자유가 박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에게 법원의 실상을 알리고 법원 내부에서 민주화와 변화를 촉구하는 작업도 재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해왔던 것이죠." 1월 26일 저녁 경기도 일산에 있는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판사실에서 정진경 부장판사를 만났다. 신임 대법원장의 취임으로 사법개혁문제가 다시 관심사로 떠오르는 요즘 그가 생각하는 사법 개혁, 국민의 신뢰를 받는 법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들어봤다. '유전무죄'엔 "글쎄"... '가진 자들 형이 가볍다'는 비판엔 "공감"
"고양지원에서 근무한 1년 동안 좋아하는 등산도 자주 못할 정도로 바빴다"는 그는 얼마 전 큰 맘 먹고 가족들과 <왕의 남자>를 보았다고 했다. 인터뷰는 영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 <왕의 남자>를 보신 소감은? "참 좋았다. 한국 영화감독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지강헌 탈주사건을 다룬 <홀리데이>는 못 보셨을텐데. 영화에서 주인공은 "법은 가진 자들의 도구"라면서 그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다. 이 말에 동의하는가? "검사가 있기 때문에 돈이 많다고 해서 (죄를 지어놓고) 무죄를 선고받기는 힘들다. 돈이 있는 자는 형이 가볍고, 돈 없는 자는 형이 무겁다는 뜻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진 자들의 죄에 대하여 형이 너무 가볍다는 국민들의 비판엔 개인적으로 상당 부분 공감한다. 다만 이들의 범죄는 구체적인 피해자가 없고 전과도 없는 경우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판사가 가벼운 형을 선고하는데 부담이 적다는 점은 지적해 두고 싶다. 그렇다고 법원이 약자들에 대하여 중형을 선고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이야기하는 것은 언론에 보도되는 소수의 사건을 두드러지게 인식하기 때문인 듯하다." "법원이 국민 기대 못 미쳤던 건 사실, 배심제 도입하면 달라질 것" - 하지만 국민들의 법원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부정적인데? "과거 법원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소위 정치적 사건에 대한 판결에 있어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법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판사들의 임용방식도 서열중심으로 관료화되어 있었다. 국민의 요구를 수용할 구조가 갖춰지지 않았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법원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가. "국민들은 피고인이나 원고, 피고와 같이 재판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다. 국민이 재판의 주체가 되어 재판에 참여하여 법원의 실상을 직접 경험해 보아야 한다. 그러려면 배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심제가 도입되면 국민들이 판사와 법원에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 판사는 사법개혁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국민의 사법참여 ▲판사 선발 방식 개선(법조일원화) ▲대법원의 개혁, 즉 정책법원으로 기능변화와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 등 세 가지를 꼽았다. 화제는 판사선발문제, 법원의 개혁방향으로 넘어갔다. -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성적을 판사의 인사기준으로 삼겠는가. 성적이 좋다고 훌륭한 판사가 아니다"라고 밝혔는데, 그 대안이 있는가. "장기적으로는 법조일원화로 가야 한다. 판사를 선발하는 데서부터 엘리트의식을 털어내야 한다. 법조경력 10년 이상의 변호사 중에서 판사를 선발하여 동일한 대우를 하여야 한다. 현재에도 판사 임용 시 10%정도는 성적에 구애받지 말고 사법연수원 교수의 추천 등에 의하여 선발함으로써 성적지상주의를 상당부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판사 선발 과정부터 관료화 엘리트 의식 털어내야" - 판사들의 관료화에 대한 지적도 여러 차례 해왔다. 법관의 모델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세계적으로 법관의 모델은 미국식과 대륙법계 모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일 프랑스와 같이 대륙법계 국가들은 판사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 업무량이 적은 대신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판사가 사법관료일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식은 판사수가 적고 판사가 일종의 법 창조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판사는 사법보조인력의 도움을 받아 단독으로 사건을 처리하며 대부분의 사건이 1심으로 종결된다. 대륙법계 모델은 판사들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은 우리와는 맞지 않다. 우리 국민이 원하는 판사상은 미국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 대법관 선발을 둘러싼 문제로 수년간 법원이 뜨거웠다. 다행히도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가 구성되고 서열을 탈피하여 대법관이 선발되기도 했다. 정 판사 같은 분들이 줄기차게 강조한 내용이기도 한데. "(대법원의) 과거와 다른 모습은 긍정적으로 본다. 대법관 제청권이 대법원장에게 있는 헌법 구조상 제도를 바꾸기보다는 현재의 제도를 잘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부에선 진보 대법관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보수-진보 구도로 가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과거와 달리 사회가 복잡해지고 국민들의 사고도 다양해진 만큼, 대법원이 사회문제에 최종 판단을 내리는 정책법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 다양한 견해를 가진 대법관이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 법관은 법과 양심에만 기속될 뿐 어떤 것에도 기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는데 현재 법원은 그러한가. "지금은 권력의 압력이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내부의 눈치는 보게 된다. 다시 말해 판결문을 작성하면서 스스로 '튀기 싫다'고 생각하거나 '상급심에서는 어떻게 판결할까'를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외부적 압력으로는 권력의 압박이 아니라 각종 이익단체의 압력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대법관 보수-진보 구분 무의미... 다양한 배경과 견해 가진 사람 나와야"
"난 엘리트가 아니다(웃음). 판사로서 '양심에 반하는 판결을 하지 않겠다'는 최초의 다짐을 지키며 살고 싶다. 만일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다면 내가 행복했을 것 같지 않다. 법원 안에서 잘 보여서 승진한다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인터뷰가 끝나자 정 판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삼겹살 집으로 안내했다. 정 판사는 인터뷰에서 말하기 곤란하다던 민감한 얘기들을 술자리에서 2시간 넘게 실명까지 거론하며 거침없이 쏟아냈다. 술안주로 저녁식사를 대신한 정 판사는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밀린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내가 윗사람 보고 일하면 이렇게 못하는데, 재판받는 당사자들이 내 가족이나 친구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힘을 내게 된다"고 했다. 법원의 개혁을 외치던 정 판사에게도 주업무는 재판임에 틀림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