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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캐자 비젼을 일구자

bukook 2006. 3. 18. 11:48

Great Pyramid Laminated Poster

황금을 캐는 민족 미지를 꿈을 현실로 바꾸는 나라 이 엄청난 세계의 환희, 인류의 경악을

이렇게 그냥 순간의 열정적 즐거움으로 날려버리기엔 뭔가아쉬운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스포츠는 정직하다 넘 정직하다 정확하다 한 그대로 정확하다. 정직한 나머지 노랑 폴대의

노랑색 묻은 볼 홈런이건만 펜스에 맞은 2루타라고 미국의 주심들이 모여 결정한 것 아닌가.

지금까지 묵묵히 쌓아온 우리 야구 선수들의 노력에 정직하다 근면에 정직하다. 피눈물의 양에

비례하여 정직하다. 자신을 얼마나 복종시켰는지 자기 정복에 정직하다. 나를 어떻게 관리 해

왔는지에 정직하다. 내가 갖고 있는 목표에 정직하다. 우리들의 투수 마운드 이 무수한 다 다른

그 폼 그 속도 그 구질을 보라.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나"에 정직했다. 우리 이번 이 기회에

나의 나됨에, 나의 나됨을 향한 노력에, 나를 만드는 나의 관리 구서구석을 한 번 첵크 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스포츠는 정직하다. 나의 나됨도 이 순간 내가 뭘하는지에 넘 정확하게 현실로

꿈으로 목표로 나타난다. 우주는 정직하다 정확하다. 심은대로 거두리라. 인생은 정직하다.

삶은 정확하다 생활에 뭘 심었는가 아니 지금 이 순건 뭘 심고 있는가. 인생은 딱 바로 자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내 삶에 내가 가진 건 바로 지금 이 순간 뿐이다. 그 외는 환상이고생각일

뿐 실제가 아닌 맘의 장난일 뿐이다 유혹이다 속임수다. 내 유일의 소유물, 내 존재가머무는

우주에서 유일한 곳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뭘 심는가심은 그대로삶에 정확히 나타난다

'야구 뉴스데스크'가 불편한 이유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출전한 한국 야구대표팀에 대해 찬사가 잇따르고 있다. 당연하다. 처음엔 아시아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만과의 첫 경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었다. 그런데 아시아 예선은 물론 8강 리그에 진출하고 나서도 미국과 멕시코 등 강호들을 잇달아 격파하며 조 1위로 4강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라이벌 일본을 극적으로 두 차례나 따돌렸다.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WBC 초대 챔피언 등극도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한국과 일본의 8강 리그 마지막 경기의 시청률은 20.3%였다. 주말도, 밤 시간도 아닌 평일 대낮에 이 정도의 시청률이 나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가정뿐 아니라 대다수 일터에서 업무를 잠시 잊은 채 TV를 쳐다봤다는 뜻이다.

오승환이 일본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 한 친구가 근무하는 오피스 빌딩은 적지 않은 함성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그렇다. WBC는 분명한 사회적 현실인 동시에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다.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 없다.

6전 전승이라는 화려한 성적 때문일까. 물론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팀의 모습이 가장 큰 이유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터다. 자본과 억압의 굴레 속에서 늘 메마르고 각박한 사회공동체와 부딪혀야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지도자, 든든한 맏형과 성실한 후배들, 빈 틈 없는 전략, 모두가 화합하고 단결한 분위기”... 이렇게 요즘의 한국대표팀이 ‘공동체’로서 보여주고 있는 따뜻하고 의젓한 모습은 하나의 이상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야구팀을 보며 사람들이 힘든 ‘삶살이’의 위안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이 “야구 대표팀에게 병역특례를 주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밝히자, 여기에 “당신 같은 무능한 정치인보다는 야구팀이 우리의 삶에 더 기쁨을 준다”는 사람들의 의견이 쏟아지는 건 결코 비난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만큼 절대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좀 더 아름답고 인간적인, 따뜻한 모습으로 꾸미지 못한 권력가와 위정자들의 잘못이 더 크다. ‘20:80의 사회’라는 말조차 옛말로 만들 정도로 더욱 잔혹해져가는 자본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그 움직임을 장려해, 사회 구성원들의 극심한 양극화와 차별을 방치-조장하고 있는 이 시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책임 말이다.

▲ 16일 오후 서울역에서 TV를 통해 WBC 한국-일본 경기를 시청하던 시민들이 한국팀이 승리하자 환호하고 있다.

그러면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뉴스의 본질은, 사회에서 일어난 ‘정보’만을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은폐되고 묻힌 현실을 꾸준히 찾아내고, 권력이 감추고 싶어 하는 ‘현상의 본질’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성실하게 밝히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긴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훨씬 더 큰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과정의 연속은 우리 스스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 공동체에서 보람과 위안을 얻도록 해줄 수 있다. ‘야구대표팀’이라는 대체재가 아닌 ‘현실 사회’ 자체에 우리의 이상향을 투여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말이다.

그래서다. 9시 정각에 시작해 9시 37분까지 일관되게 진행되는 ‘야구 뉴스데스크’가 나는 불편하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좋은 소식을,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진 사안을 알려줘야 한다”는 편집 담당자들의 고민도 물론 존재하겠지만, 그런 뉴스의 홍수를 시청자들이 강요당하는 사이 우리의 현실 사회를 냉혹하게 만드는 요건은 계속해서 성숙하고 있다.

‘땅의 스튜어디스’라는 말만 믿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 KTX 여 승무원은 이제 초유의 집단 해고 앞에 와 있고, 평택 대추리에는 50년을 삶터로 삼아왔던 땅을 제국에 바칠 수는 없다는 늙은 농부들의 울음이 밤마다 촛불로, 눈물로 울려 퍼지고 있다. 시행 주체인 정부 스스로도 부정했던 새만금의 ‘농지적 가치’가 대법원에 의해 인정받아 수천년을 버텨온 갯벌이 곧 사라질 처지다. 4년 전, 모두가 월드컵과 붉은 악마에 취해 있을 때 여중생들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고 있었던 그 때와 지금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언론이 먼저 사회와 긴장하지 않는다면, 그 언론의 영향을 받는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와 긴장할 수 없다. 언제까지 우리는 ‘야구대표팀’에서 우리가 꿈꾸는 사회의 이상향을 찾아야 할 것인가. 오히려 스포츠 자체는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공정한 규칙이 올바르게 서 있는 스포츠에선, 약자의 반란도 감동도 화합도 다 가능하다고 말이다. 언론이 긴장하지 않는다면, 스포츠 자체의 정직한 교훈은 올곧게 전달되지 않는다. 사회와의 긴장을 통해 현실을 바꿔야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을 권력의 의지에 따라 그 본질로부터 더욱 멀게 할 뿐이다.